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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새봄

"새로운 장르, 새로운 연기, 새로운 삶. 모든 것이 새로운 20년 차 배우, 이기우의 사뭇 다른 봄.

기사, 사진제공 | 더갤러리아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밤에 피는 꽃’이라는 작품으로 첫 사극 연기에 도전했다. 2003년 영화 <클래식>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으니 그동안 정말 많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는데, 이번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처음 도전하는 사극이다 보니 이 역할을 해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대본을 더욱더 열심히 읽어 내려갔고, 읽어보니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이라 무조건 도전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극 자체는 굉장히 유쾌한데, 내가 맡았던 ‘박윤학’이라는 인물이 극중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이라 처음 하는 사극이지만 이 정도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느낌이 있었다. 다행히 작품이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다음에 또 다른 사극 작품을 하게 된다면 어떤 도전을 해볼 수 있을지 기대되기도 한다.

처음 하는 사극 연기이다 보니 준비할 것도, 공부할 것도 많았을 것 같다.
말의 빠르기 같은 것도 연습해야 했다. 옛날엔 지금 현대인들처럼 말을 빨리 하지 않았고, 특히 지체 있는 신분이라면 더욱 그랬다고 한다. 40여 년간 살아오며 말하던 속도가 있으니 단순히 카메라 앞에서만 대사를 느리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촬영 전부터 일상에서 꾸준히 말을 느리게 하는 연습을 했고, 기본적으로 말의 템포를 느리게 한 상태에서 그 위에 연기를 얹어야 했다. 이것도 로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현대극은 기본적으로 내가 현대인이기 때문에 그냥 연기하면 되는데 조선시대 인물을 연기할 땐 이렇게 말의 속도 등 그 시대의 생활양식들을 어느 정도 인지한 후 그 위에 연기를 얹어야 하더라. 작가님이 조선시대 의복을 비롯해 언어, 미풍양속 등 다양한 분야에 해박하셔서 대본 리딩 단계에서부터 많은 도움을 주셨다. 작품 하나를 할 때마다 모든 게 공부가 되지만, 특히 이번 작품은 마치 학교에서 국영수만 배우다가 처음으로 다른 과목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어려운 동시에 재미있고 신선한 느낌으로 연기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 김상중, 서이숙, 김미경, 김광규 배우 등 많은 선배 배우들과 함께하며 그분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아무래도 사극 경험도 많으시고 연기 경력으로도 훨씬 선배님들이시다 보니 그분들의 연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영광이었다. 특히 김상중 선배님이 연기한 ‘좌상대감’ 역은 극중 최고 빌런이었는데, 극 초반엔 그러한 면모를 숨기고 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본색을 드러내는 무거운 신들에서 선배님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배우들이 촬영이 시작되면 달라지지만 그중에서도 김상중 선배님은 슛 들어가기 전과 후가 정말 다르다. 평소엔 너무 유머러스하고 매너도 좋으신데, 슛 사인이 떨어지면 그런 무거운 장면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시는 걸 보며 깊은 인상과 감동을 받을 때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20여 년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작품으로 기억에 남게 됐나?
    누구에게나 첫경험은 명징하게 각인된다. 첫 사극 도전은 내게 그런 큰 의미로 남았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 너무 안 어울리고 이상하다는 댓글이 달리면 그땐 절대 안 되겠다’ ‘그런 댓글만 안 달리게 해내자’는 것이 마지노선이었는데, 다행히 그런 리뷰는 없었고 작품도 정말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아 용기를 얻었다. 한편으론 20여 년간 일해오면서 사극에 등장하는 나 자신을 처음으로 모니터해보니 고칠 점도 많이 보이고 시도해보고 싶은 것들도 많아서, 머지않은 시기에 또 사극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긴 시간 꽤 다작을 했다. 배우로서 시대의 흐름이나 업계 변화를 체감할 때가 있나?
    데뷔작이었던 <클래식>은 영화를 필름으로 제작하던 시대의 작품이다. 디지털 장비를 사용하는 요즘엔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에게 “요새는 이런 걸로 다 돼요?” 하고 물어볼 만큼 장비들도 콤팩트해졌고, 그런 걸 볼 때마다 ‘아, 내가 데뷔한 지 꽤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감독님들 나이가 나와 비슷하거나 점점 어려지면서 그분들이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를 때도 세월을 체감한다.(웃음)

    그런가 하면 요즘엔 예능, OTT, 유튜브, 심지어 개인 SNS 등 플랫폼이 많아진 것도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양질의 것을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연기자의 입장에선 더욱 유용하기도 할 것 같다.
    물론 배우마다 성향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 채널들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연기자들에겐 나름 해방구가 될 수도 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 나만 알기에 아까운 이야기들을 적합한 채널들을 통해 잘 소통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OTT 등의 플랫폼이 많아질수록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배우로서는 이러한 생태계가 잘 자리 잡히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너무 빠른 속도로 수많은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 또한 과도기가 지나면 자연스레 올바른 방향으로 정착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콘텐츠들 가운데 누군가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 그런 좋은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가 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 입양해 키우고 있는 반려견 ‘테디’의 계정이 오히려 더 유명하다.(웃음) 테디 시점으로 포스팅을 하는 이유가 있을까?
    사람이 말할 때보다 강아지 시점으로 얘기할 때 좀 더 편하고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 같아서이다. 실제로 테디의 팔로워들은 그 글을 내가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웃음) 그래서 모든 DM들이 다 ‘테디야!’ 하면서 반말로 오는 것도 특징이다. 개인 계정에서는 속 시원히 얘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데, 이렇게 테디 계정을 통해 테디 시점으로 얘기하다 보면 좀 더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20여 년간 한 가지 일을 해왔지만 동시에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하는 게 배우라는 직업이다. 이 일이 더 이상 설레지 않거나 두려울 때도 있지 않나? 그럴 땐 어떻게 극복하나?
    매너리즘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이니, 혼자서 그걸 극복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개인적으론 그럴 때마다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많이 청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나 동료들에게 “내가 이러저러해서 힘들다. 언제까지 연기를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툭 터놓고 얘기하는 편이다. 한편으로는 분명히 20년 전에 함께 이 일을 시작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 길을 계속 걷고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사실을 체감하는 찰나 스스로에게 용기를 얻기도 한다. ‘잘해왔다’고까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해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순간이 분명히 있다.

  • <더갤러리아> 3월호엔 ‘웨딩’을 주제로 한 여러 가지 칼럼들이 담길 예정이다. 마침 얼마 전에 결혼하고 테디와 차차라는 반려견을 키우면서 가정을 꾸리게 되지 않았나? 웨딩은 결혼 그 자체보다 누군가와 함께 가족이 돼간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 ‘가족이 돼간다’고 느낄 땐 언제인지 궁금하다.
    아내와 연애하다가 결혼을 결심한 순간부터 ‘가족이 되었다’고 느꼈다. 지금은 가족 안에서 가장이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더 크다. 내가 아내와 강아지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는 뭘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할 때 내가 누군가의 남편이자 우리 가족의 가장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다행히 이러한 고민을 충분히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무척이나 행복하다. 마치 첫 사극에 도전하며 새로운 챕터를 시작한 것처럼, 아내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며 가족들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또한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어가는 기분이다.